글 수 125
2002.05.18 13:58:07 (*.237.241.223)
2198
[조민욱의 ‘무림 고수 열전’] ‘파깨비’ 이창후①
(2002.02.14)
특전사에 표창술 전수한 철학도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는 도깨비가 살고 있다. 온몸이 파랗다 하여 ‘파란 도깨비’ 혹은 ‘파깨비’라 불린다. 바로 이창후(李昌厚ㆍ33)씨다.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1988년 입학 후 지금까지 일년 내내 파란색 옷만 고집하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는 늘 파란색이다. 파란색 바지에 파란색 티셔츠 파란색 외투. 심지어 양말과 운동화 목도리도 파랗다. 초상집에 문상 갈 때에도 파란색 옷을 입고 간다. “청학동에서 왔다”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물의 색깔인 파란 옷을 입는다” 등 억측도 많지만 그가 파란옷을 입는 이유는 단지 때가 타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는 대구에서 올라온 자취생이다. 단지 괴짜로만 여겨 ‘파깨비’를 얕보다간 큰 코 다친다. 태권도 공인 4단에 학사장교로 공수특전사에서 복무했으며, 부대에서는 태권도 교관을 지냈다. 태권도 하는 도깨비. 그것도 보통 태권도가 아니라 ‘무술 태권도’로 정평이 난 ‘연무재(硏武齋)’ 수석 사범이다. 연무재는 그의 서울대 태권도부 동문 선배이자 현재 연무재 부원장인 서재영(徐在永ㆍ48)씨가 전통 태권도를 연구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 자리잡고 있는 연무재를 찾았다.
도장 문을 연 순간 잠시 어리둥절했다. 태권도를 하는 곳이면 으레 “태권” “얍!” 이런 힘찬 기합과 함께 멋진 발차기가 붕붕 공중을 어지럽게 수놓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10여명 남짓한 회원들이 모두 바닥에 누워 몸을 활처럼 굽히고 있었다. 요가 수련장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호흡을 가미한 이런 동작을 하는 이유는 격한 수련으로 들어가기 전에 온몸의 관절과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물론 일반 태권도 도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잠시 후 이창후씨가 나타났다. 역시 파란색이었다. 서둘러 도복으로 갈아입고 그도 수련에 참가했다. 하얀 도복에 검은 띠였다.
몸풀기가 끝난 후 본 수련으로 들어갔다. 먼저 ‘주춤 서 몸통 지르기’. 양 다리를 어깨 넓이 이상으로 벌리고 말 타는 자세로 걸터앉아 주먹으로 정면을 지르는 동작이다. 흔히 말하는 기마식에서 정권지르기. 그런데 이게 그냥 보통 정권지르기가 아니었다. 허리에 위치한 주먹이 곧장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틀어 어깨와 주먹이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주먹이 나가는데 마치 회초리를 휘두르듯이 온몸을 격렬하게 비트는 것이었다.
“뻣뻣하게 주먹만 지르는 것은 위력이 없습니다. 팔뚝의 힘만 전달될 뿐이죠. 하체를 낮추고 굳건히 안정되게 한 후 어깨의 힘을 빼고 허리를 쥐어짜듯이 비틀면서 주먹을 뿌려야 온몸의 파워가 실리게 됩니다. 끝에 추가 달린 채찍처럼 말입니다. 이는 호흡이 가미되어야 제대로 된 촌경이 가능하게 됩니다.”
촌경(寸勁)이란 극히 짧은 순간에 온몸의 힘이 마치 폭발하듯이 발산되는 것을 말한다. 태권도의 몸짓은 일반적으로 직선이다. 주먹도 발도 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힘을 외부로 표출시킨다. 그런데 연무재의 그것은 곡선이었다. 몸통과 팔다리를 쥐어 짜는 이런 동작들은 품새(몇 가지 공격과 방어의 동작들을 연결시킨 것)에 들어가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기존의 태권도 품새를 낱낱이 연구 분석하여 무술적 의미를 되살려 새로이 만들었다는 연법1식에서 7식까지의 연속동작들. 만련(慢鍊)이라 하여 느리게 움직일 때는 하나의 품새(연법)를 1분 정도에 마치다가 쾌련(快鍊)으로 들어가면 불과 10초만에 품새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몸통과 팔다리를 격렬하게 비틀고 짜면서 말이다. 순간순간 격렬하게 바닥을 구르는 동작들이 많은데 흔히 말하는 진각(震脚)이다. 이는 발을 세게 구르면서 온몸을 진동시켜 파워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이 또한 기존의 태권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작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팔다리를 절대로 쭉쭉 펴거나 높이 차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권도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단옆차기도 없었다.
“발차기를 높이 하면 뭐합니까. 위력도 없고 상대방에게 잡히기 쉬울 뿐인데요. 한번 잡혀 넘어지면 끝이죠. 무술에서는 금기입니다.”
연무재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동작이 무술의 살인기술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보이기 위한 수련이나 겉만 화려한 발차기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이동동작에서도 그냥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낮게 차면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태권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순간 기자의 눈에 들어온 벽에 걸린 액자의 글귀. ‘極柔軟後極强’(극유연후극강). 지극히 유연해진 후에 지극히 강해진다. 그제야 연무재가 추구하는 ‘무술 태권도’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딱딱한 태권도, 발차기만 하는 태권도가 아니라 온몸을 부드럽게 하고 손동작 발동작 하나하나에 온몸의 체중을 실어 가격하는 무술의 공방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태권도 시합이요? 발차기로 포인트 따는 경기방식에 연무재는 맞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스포츠가 아니라 무술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합은 하지 않습니다. 격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만 상하게 하는 격파는 사절입니다.” 격렬한 품새 수련이 끝난 후 그가 이번에는 기다란 곤봉을 들고 나왔다. 방금 끝낸 연법1식을 봉을 들고 똑같이 움직인다. 태권도에 봉이라니. 쿵푸 도장도 아니고 말이다.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 민족은 기마민족이다. 모든 무예의 기원은 마상(馬上)무예다. 즉 말 타고 창이나 칼 등 병장기를 휘두르는 것이 무예의 시초다. 그것을 땅에서 병장기를 빼고 하면 태권도 품새가 되고, 무기를 들면 그대로 무기술이 된다.”
무예의 근원이 마상무예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품새 즉 맨손 무예인 권법(拳法)과 병장기 무술이 서로 호환될 수 있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병장기를 손이 조금 더 늘어난 몸의 일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바탕 봉을 휘두른 그는 느닷없이 표창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한쪽 벽에 마련된 스티로폼을 향해 던지는 것이었다. 표창의 굵기는 사람 엄지손가락 굵기의 것에서부터 머리핀 굵기의 가느다란 것도 있었다. 그의 손을 떠난 머리핀 굵기의 표창은 ‘팽’하는 소리를 내며 벽과 90도 직각으로 빨려 들어가듯 꽂혔다.
“이러한 표창도 일종의 수련입니다. 하체를 고정시키고 어깨 힘을 뺀 채 허리를 틀어 던지면 정확하게 표적물에 꽂히죠. 무술 기본동작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무거운 것보단 가벼운 것이 던지기가 어렵고 수련의 효과도 큽니다.”
한창 표창술에 심취했을 때에는 가방 안에 늘 이십여 자루의 표창을 들고 다녔다는 그가 구사하는 표창술은 조금 특이하다. 보통 표창을 던지면 회전을 하면서 날아가게 마련인데 전혀 회전이 없이 일자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던져야 정확하게 꽂힌단다. 자신이 복무했던 공수특전사에도 이처럼 ‘회전 없는 표창술’을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기존의 전형화된 틀을 벗어난 품새에 봉술 표창술. 많은 이들이 소문을 듣고 연무재를 찾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에 대부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고 한다. 이처럼 연무재는 강한 태권도, 강한 무술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연무재 원장인 이광희(李光熙ㆍ55)씨의 공로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64학번인 이광희씨는 초기 태권도 5대 도장의 하나였던 창무관에서 8단을 땄으며, 30년 이상 세계 각국의 무술을 비교 연구하여 오늘날 연무재류(流)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독특한 태권도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창후씨는 그를 서울대 태권도 동아리 선후배로 만나 사제(師弟)의 연을 맺게 되었다.
■ 5개 국어로 태권도 사이트 운영
이창후씨는 현재 태권도 철학의 이론화 작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원래 그의 전공이 철학이다. 작년에는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라는 책을 냈으며, 인터넷 상에서는 태권도 전문사이트(www.taekwondobible.com)를 운영하고 있다. 한글,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 프랑스어, 말레이어로도 제작되어 있다. 그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어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재주많은 ‘도깨비’였다. 새해 초에는 루마니아에 다녀왔다. 그곳 현지인 태권도 사범의 초청으로 루마니아어로 된 태권도 교본을 만드는 작업을 도와주었단다. 작년 여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태권도를 전수해주고 왔다. 올해는 미국과 캐나다에 갈 예정이다. “태권도는 세계 공용어입니다. 그리고 경기 태권도와 무술 태권도는 저마다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서로의 장점을 살려 나가면 더욱 강하고 아름다운 태권도가 나올 것입니다.”
책을 내고 5개 국어로 된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표창을 던지는 ‘파란 도깨비’에게 태권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의 자작시를 감상해보자.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 하나의 단단한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니요/ 부풀어 오르는 가슴/ 그 속의 불길을 내뿜기 위함이 아니요/ 조용한 물가에 거품을 일으키는/ 한마리의 고기를 잡기 위함이 아니요/ 저 높은 곳을 향해/ 날개를 달기 위함이 아니다/ 다섯 손가락이 조용히 긴장하는/ 손 안의 작은 공간에서/ 무한히 열리는 삶을 위한 길로 들어서고자 함이니/ …’
◆조민욱
‘무림 고수 열전’ 필자인 조민욱(32) 기자는 서울대 정치학과 88학번이다. 대한십팔기협회 공인 십팔기 5단, 동양무예연구소 전문위원이며 조선일보 인터넷 기자클럽(http://club.chosun.com/refo14)에서 ‘무예 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달마야 장풍 받아라’(조선일보사 간)라는 무예 교양서적을 펴낸 무예전문기자이다.
( 조민욱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 mwcho@chosun.com )
(2002.02.14)
특전사에 표창술 전수한 철학도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는 도깨비가 살고 있다. 온몸이 파랗다 하여 ‘파란 도깨비’ 혹은 ‘파깨비’라 불린다. 바로 이창후(李昌厚ㆍ33)씨다.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1988년 입학 후 지금까지 일년 내내 파란색 옷만 고집하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는 늘 파란색이다. 파란색 바지에 파란색 티셔츠 파란색 외투. 심지어 양말과 운동화 목도리도 파랗다. 초상집에 문상 갈 때에도 파란색 옷을 입고 간다. “청학동에서 왔다”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물의 색깔인 파란 옷을 입는다” 등 억측도 많지만 그가 파란옷을 입는 이유는 단지 때가 타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는 대구에서 올라온 자취생이다. 단지 괴짜로만 여겨 ‘파깨비’를 얕보다간 큰 코 다친다. 태권도 공인 4단에 학사장교로 공수특전사에서 복무했으며, 부대에서는 태권도 교관을 지냈다. 태권도 하는 도깨비. 그것도 보통 태권도가 아니라 ‘무술 태권도’로 정평이 난 ‘연무재(硏武齋)’ 수석 사범이다. 연무재는 그의 서울대 태권도부 동문 선배이자 현재 연무재 부원장인 서재영(徐在永ㆍ48)씨가 전통 태권도를 연구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 자리잡고 있는 연무재를 찾았다.
도장 문을 연 순간 잠시 어리둥절했다. 태권도를 하는 곳이면 으레 “태권” “얍!” 이런 힘찬 기합과 함께 멋진 발차기가 붕붕 공중을 어지럽게 수놓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10여명 남짓한 회원들이 모두 바닥에 누워 몸을 활처럼 굽히고 있었다. 요가 수련장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호흡을 가미한 이런 동작을 하는 이유는 격한 수련으로 들어가기 전에 온몸의 관절과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물론 일반 태권도 도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잠시 후 이창후씨가 나타났다. 역시 파란색이었다. 서둘러 도복으로 갈아입고 그도 수련에 참가했다. 하얀 도복에 검은 띠였다.
몸풀기가 끝난 후 본 수련으로 들어갔다. 먼저 ‘주춤 서 몸통 지르기’. 양 다리를 어깨 넓이 이상으로 벌리고 말 타는 자세로 걸터앉아 주먹으로 정면을 지르는 동작이다. 흔히 말하는 기마식에서 정권지르기. 그런데 이게 그냥 보통 정권지르기가 아니었다. 허리에 위치한 주먹이 곧장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틀어 어깨와 주먹이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주먹이 나가는데 마치 회초리를 휘두르듯이 온몸을 격렬하게 비트는 것이었다.
“뻣뻣하게 주먹만 지르는 것은 위력이 없습니다. 팔뚝의 힘만 전달될 뿐이죠. 하체를 낮추고 굳건히 안정되게 한 후 어깨의 힘을 빼고 허리를 쥐어짜듯이 비틀면서 주먹을 뿌려야 온몸의 파워가 실리게 됩니다. 끝에 추가 달린 채찍처럼 말입니다. 이는 호흡이 가미되어야 제대로 된 촌경이 가능하게 됩니다.”
촌경(寸勁)이란 극히 짧은 순간에 온몸의 힘이 마치 폭발하듯이 발산되는 것을 말한다. 태권도의 몸짓은 일반적으로 직선이다. 주먹도 발도 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힘을 외부로 표출시킨다. 그런데 연무재의 그것은 곡선이었다. 몸통과 팔다리를 쥐어 짜는 이런 동작들은 품새(몇 가지 공격과 방어의 동작들을 연결시킨 것)에 들어가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기존의 태권도 품새를 낱낱이 연구 분석하여 무술적 의미를 되살려 새로이 만들었다는 연법1식에서 7식까지의 연속동작들. 만련(慢鍊)이라 하여 느리게 움직일 때는 하나의 품새(연법)를 1분 정도에 마치다가 쾌련(快鍊)으로 들어가면 불과 10초만에 품새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몸통과 팔다리를 격렬하게 비틀고 짜면서 말이다. 순간순간 격렬하게 바닥을 구르는 동작들이 많은데 흔히 말하는 진각(震脚)이다. 이는 발을 세게 구르면서 온몸을 진동시켜 파워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이 또한 기존의 태권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작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팔다리를 절대로 쭉쭉 펴거나 높이 차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권도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단옆차기도 없었다.
“발차기를 높이 하면 뭐합니까. 위력도 없고 상대방에게 잡히기 쉬울 뿐인데요. 한번 잡혀 넘어지면 끝이죠. 무술에서는 금기입니다.”
연무재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동작이 무술의 살인기술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보이기 위한 수련이나 겉만 화려한 발차기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이동동작에서도 그냥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낮게 차면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태권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순간 기자의 눈에 들어온 벽에 걸린 액자의 글귀. ‘極柔軟後極强’(극유연후극강). 지극히 유연해진 후에 지극히 강해진다. 그제야 연무재가 추구하는 ‘무술 태권도’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딱딱한 태권도, 발차기만 하는 태권도가 아니라 온몸을 부드럽게 하고 손동작 발동작 하나하나에 온몸의 체중을 실어 가격하는 무술의 공방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태권도 시합이요? 발차기로 포인트 따는 경기방식에 연무재는 맞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스포츠가 아니라 무술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합은 하지 않습니다. 격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만 상하게 하는 격파는 사절입니다.” 격렬한 품새 수련이 끝난 후 그가 이번에는 기다란 곤봉을 들고 나왔다. 방금 끝낸 연법1식을 봉을 들고 똑같이 움직인다. 태권도에 봉이라니. 쿵푸 도장도 아니고 말이다.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 민족은 기마민족이다. 모든 무예의 기원은 마상(馬上)무예다. 즉 말 타고 창이나 칼 등 병장기를 휘두르는 것이 무예의 시초다. 그것을 땅에서 병장기를 빼고 하면 태권도 품새가 되고, 무기를 들면 그대로 무기술이 된다.”
무예의 근원이 마상무예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품새 즉 맨손 무예인 권법(拳法)과 병장기 무술이 서로 호환될 수 있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병장기를 손이 조금 더 늘어난 몸의 일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바탕 봉을 휘두른 그는 느닷없이 표창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한쪽 벽에 마련된 스티로폼을 향해 던지는 것이었다. 표창의 굵기는 사람 엄지손가락 굵기의 것에서부터 머리핀 굵기의 가느다란 것도 있었다. 그의 손을 떠난 머리핀 굵기의 표창은 ‘팽’하는 소리를 내며 벽과 90도 직각으로 빨려 들어가듯 꽂혔다.
“이러한 표창도 일종의 수련입니다. 하체를 고정시키고 어깨 힘을 뺀 채 허리를 틀어 던지면 정확하게 표적물에 꽂히죠. 무술 기본동작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무거운 것보단 가벼운 것이 던지기가 어렵고 수련의 효과도 큽니다.”
한창 표창술에 심취했을 때에는 가방 안에 늘 이십여 자루의 표창을 들고 다녔다는 그가 구사하는 표창술은 조금 특이하다. 보통 표창을 던지면 회전을 하면서 날아가게 마련인데 전혀 회전이 없이 일자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던져야 정확하게 꽂힌단다. 자신이 복무했던 공수특전사에도 이처럼 ‘회전 없는 표창술’을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기존의 전형화된 틀을 벗어난 품새에 봉술 표창술. 많은 이들이 소문을 듣고 연무재를 찾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에 대부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고 한다. 이처럼 연무재는 강한 태권도, 강한 무술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연무재 원장인 이광희(李光熙ㆍ55)씨의 공로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64학번인 이광희씨는 초기 태권도 5대 도장의 하나였던 창무관에서 8단을 땄으며, 30년 이상 세계 각국의 무술을 비교 연구하여 오늘날 연무재류(流)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독특한 태권도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창후씨는 그를 서울대 태권도 동아리 선후배로 만나 사제(師弟)의 연을 맺게 되었다.
■ 5개 국어로 태권도 사이트 운영
이창후씨는 현재 태권도 철학의 이론화 작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원래 그의 전공이 철학이다. 작년에는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라는 책을 냈으며, 인터넷 상에서는 태권도 전문사이트(www.taekwondobible.com)를 운영하고 있다. 한글,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 프랑스어, 말레이어로도 제작되어 있다. 그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어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재주많은 ‘도깨비’였다. 새해 초에는 루마니아에 다녀왔다. 그곳 현지인 태권도 사범의 초청으로 루마니아어로 된 태권도 교본을 만드는 작업을 도와주었단다. 작년 여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태권도를 전수해주고 왔다. 올해는 미국과 캐나다에 갈 예정이다. “태권도는 세계 공용어입니다. 그리고 경기 태권도와 무술 태권도는 저마다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서로의 장점을 살려 나가면 더욱 강하고 아름다운 태권도가 나올 것입니다.”
책을 내고 5개 국어로 된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표창을 던지는 ‘파란 도깨비’에게 태권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의 자작시를 감상해보자.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 하나의 단단한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니요/ 부풀어 오르는 가슴/ 그 속의 불길을 내뿜기 위함이 아니요/ 조용한 물가에 거품을 일으키는/ 한마리의 고기를 잡기 위함이 아니요/ 저 높은 곳을 향해/ 날개를 달기 위함이 아니다/ 다섯 손가락이 조용히 긴장하는/ 손 안의 작은 공간에서/ 무한히 열리는 삶을 위한 길로 들어서고자 함이니/ …’
◆조민욱
‘무림 고수 열전’ 필자인 조민욱(32) 기자는 서울대 정치학과 88학번이다. 대한십팔기협회 공인 십팔기 5단, 동양무예연구소 전문위원이며 조선일보 인터넷 기자클럽(http://club.chosun.com/refo14)에서 ‘무예 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달마야 장풍 받아라’(조선일보사 간)라는 무예 교양서적을 펴낸 무예전문기자이다.
( 조민욱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 mwcho@chosun.com )
(2002.02.14)
특전사에 표창술 전수한 철학도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는 도깨비가 살고 있다. 온몸이 파랗다 하여 ‘파란 도깨비’ 혹은 ‘파깨비’라 불린다. 바로 이창후(李昌厚ㆍ33)씨다.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1988년 입학 후 지금까지 일년 내내 파란색 옷만 고집하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는 늘 파란색이다. 파란색 바지에 파란색 티셔츠 파란색 외투. 심지어 양말과 운동화 목도리도 파랗다. 초상집에 문상 갈 때에도 파란색 옷을 입고 간다. “청학동에서 왔다”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물의 색깔인 파란 옷을 입는다” 등 억측도 많지만 그가 파란옷을 입는 이유는 단지 때가 타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는 대구에서 올라온 자취생이다. 단지 괴짜로만 여겨 ‘파깨비’를 얕보다간 큰 코 다친다. 태권도 공인 4단에 학사장교로 공수특전사에서 복무했으며, 부대에서는 태권도 교관을 지냈다. 태권도 하는 도깨비. 그것도 보통 태권도가 아니라 ‘무술 태권도’로 정평이 난 ‘연무재(硏武齋)’ 수석 사범이다. 연무재는 그의 서울대 태권도부 동문 선배이자 현재 연무재 부원장인 서재영(徐在永ㆍ48)씨가 전통 태권도를 연구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 자리잡고 있는 연무재를 찾았다.
도장 문을 연 순간 잠시 어리둥절했다. 태권도를 하는 곳이면 으레 “태권” “얍!” 이런 힘찬 기합과 함께 멋진 발차기가 붕붕 공중을 어지럽게 수놓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10여명 남짓한 회원들이 모두 바닥에 누워 몸을 활처럼 굽히고 있었다. 요가 수련장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호흡을 가미한 이런 동작을 하는 이유는 격한 수련으로 들어가기 전에 온몸의 관절과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물론 일반 태권도 도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잠시 후 이창후씨가 나타났다. 역시 파란색이었다. 서둘러 도복으로 갈아입고 그도 수련에 참가했다. 하얀 도복에 검은 띠였다.
몸풀기가 끝난 후 본 수련으로 들어갔다. 먼저 ‘주춤 서 몸통 지르기’. 양 다리를 어깨 넓이 이상으로 벌리고 말 타는 자세로 걸터앉아 주먹으로 정면을 지르는 동작이다. 흔히 말하는 기마식에서 정권지르기. 그런데 이게 그냥 보통 정권지르기가 아니었다. 허리에 위치한 주먹이 곧장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틀어 어깨와 주먹이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주먹이 나가는데 마치 회초리를 휘두르듯이 온몸을 격렬하게 비트는 것이었다.
“뻣뻣하게 주먹만 지르는 것은 위력이 없습니다. 팔뚝의 힘만 전달될 뿐이죠. 하체를 낮추고 굳건히 안정되게 한 후 어깨의 힘을 빼고 허리를 쥐어짜듯이 비틀면서 주먹을 뿌려야 온몸의 파워가 실리게 됩니다. 끝에 추가 달린 채찍처럼 말입니다. 이는 호흡이 가미되어야 제대로 된 촌경이 가능하게 됩니다.”
촌경(寸勁)이란 극히 짧은 순간에 온몸의 힘이 마치 폭발하듯이 발산되는 것을 말한다. 태권도의 몸짓은 일반적으로 직선이다. 주먹도 발도 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힘을 외부로 표출시킨다. 그런데 연무재의 그것은 곡선이었다. 몸통과 팔다리를 쥐어 짜는 이런 동작들은 품새(몇 가지 공격과 방어의 동작들을 연결시킨 것)에 들어가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기존의 태권도 품새를 낱낱이 연구 분석하여 무술적 의미를 되살려 새로이 만들었다는 연법1식에서 7식까지의 연속동작들. 만련(慢鍊)이라 하여 느리게 움직일 때는 하나의 품새(연법)를 1분 정도에 마치다가 쾌련(快鍊)으로 들어가면 불과 10초만에 품새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몸통과 팔다리를 격렬하게 비틀고 짜면서 말이다. 순간순간 격렬하게 바닥을 구르는 동작들이 많은데 흔히 말하는 진각(震脚)이다. 이는 발을 세게 구르면서 온몸을 진동시켜 파워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이 또한 기존의 태권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작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팔다리를 절대로 쭉쭉 펴거나 높이 차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권도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단옆차기도 없었다.
“발차기를 높이 하면 뭐합니까. 위력도 없고 상대방에게 잡히기 쉬울 뿐인데요. 한번 잡혀 넘어지면 끝이죠. 무술에서는 금기입니다.”
연무재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동작이 무술의 살인기술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보이기 위한 수련이나 겉만 화려한 발차기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이동동작에서도 그냥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낮게 차면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태권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순간 기자의 눈에 들어온 벽에 걸린 액자의 글귀. ‘極柔軟後極强’(극유연후극강). 지극히 유연해진 후에 지극히 강해진다. 그제야 연무재가 추구하는 ‘무술 태권도’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딱딱한 태권도, 발차기만 하는 태권도가 아니라 온몸을 부드럽게 하고 손동작 발동작 하나하나에 온몸의 체중을 실어 가격하는 무술의 공방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태권도 시합이요? 발차기로 포인트 따는 경기방식에 연무재는 맞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스포츠가 아니라 무술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합은 하지 않습니다. 격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만 상하게 하는 격파는 사절입니다.” 격렬한 품새 수련이 끝난 후 그가 이번에는 기다란 곤봉을 들고 나왔다. 방금 끝낸 연법1식을 봉을 들고 똑같이 움직인다. 태권도에 봉이라니. 쿵푸 도장도 아니고 말이다.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 민족은 기마민족이다. 모든 무예의 기원은 마상(馬上)무예다. 즉 말 타고 창이나 칼 등 병장기를 휘두르는 것이 무예의 시초다. 그것을 땅에서 병장기를 빼고 하면 태권도 품새가 되고, 무기를 들면 그대로 무기술이 된다.”
무예의 근원이 마상무예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품새 즉 맨손 무예인 권법(拳法)과 병장기 무술이 서로 호환될 수 있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병장기를 손이 조금 더 늘어난 몸의 일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바탕 봉을 휘두른 그는 느닷없이 표창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한쪽 벽에 마련된 스티로폼을 향해 던지는 것이었다. 표창의 굵기는 사람 엄지손가락 굵기의 것에서부터 머리핀 굵기의 가느다란 것도 있었다. 그의 손을 떠난 머리핀 굵기의 표창은 ‘팽’하는 소리를 내며 벽과 90도 직각으로 빨려 들어가듯 꽂혔다.
“이러한 표창도 일종의 수련입니다. 하체를 고정시키고 어깨 힘을 뺀 채 허리를 틀어 던지면 정확하게 표적물에 꽂히죠. 무술 기본동작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무거운 것보단 가벼운 것이 던지기가 어렵고 수련의 효과도 큽니다.”
한창 표창술에 심취했을 때에는 가방 안에 늘 이십여 자루의 표창을 들고 다녔다는 그가 구사하는 표창술은 조금 특이하다. 보통 표창을 던지면 회전을 하면서 날아가게 마련인데 전혀 회전이 없이 일자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던져야 정확하게 꽂힌단다. 자신이 복무했던 공수특전사에도 이처럼 ‘회전 없는 표창술’을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기존의 전형화된 틀을 벗어난 품새에 봉술 표창술. 많은 이들이 소문을 듣고 연무재를 찾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에 대부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고 한다. 이처럼 연무재는 강한 태권도, 강한 무술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연무재 원장인 이광희(李光熙ㆍ55)씨의 공로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64학번인 이광희씨는 초기 태권도 5대 도장의 하나였던 창무관에서 8단을 땄으며, 30년 이상 세계 각국의 무술을 비교 연구하여 오늘날 연무재류(流)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독특한 태권도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창후씨는 그를 서울대 태권도 동아리 선후배로 만나 사제(師弟)의 연을 맺게 되었다.
■ 5개 국어로 태권도 사이트 운영
이창후씨는 현재 태권도 철학의 이론화 작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원래 그의 전공이 철학이다. 작년에는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라는 책을 냈으며, 인터넷 상에서는 태권도 전문사이트(www.taekwondobible.com)를 운영하고 있다. 한글,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 프랑스어, 말레이어로도 제작되어 있다. 그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어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재주많은 ‘도깨비’였다. 새해 초에는 루마니아에 다녀왔다. 그곳 현지인 태권도 사범의 초청으로 루마니아어로 된 태권도 교본을 만드는 작업을 도와주었단다. 작년 여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태권도를 전수해주고 왔다. 올해는 미국과 캐나다에 갈 예정이다. “태권도는 세계 공용어입니다. 그리고 경기 태권도와 무술 태권도는 저마다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서로의 장점을 살려 나가면 더욱 강하고 아름다운 태권도가 나올 것입니다.”
책을 내고 5개 국어로 된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표창을 던지는 ‘파란 도깨비’에게 태권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의 자작시를 감상해보자.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 하나의 단단한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니요/ 부풀어 오르는 가슴/ 그 속의 불길을 내뿜기 위함이 아니요/ 조용한 물가에 거품을 일으키는/ 한마리의 고기를 잡기 위함이 아니요/ 저 높은 곳을 향해/ 날개를 달기 위함이 아니다/ 다섯 손가락이 조용히 긴장하는/ 손 안의 작은 공간에서/ 무한히 열리는 삶을 위한 길로 들어서고자 함이니/ …’
◆조민욱
‘무림 고수 열전’ 필자인 조민욱(32) 기자는 서울대 정치학과 88학번이다. 대한십팔기협회 공인 십팔기 5단, 동양무예연구소 전문위원이며 조선일보 인터넷 기자클럽(http://club.chosun.com/refo14)에서 ‘무예 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달마야 장풍 받아라’(조선일보사 간)라는 무예 교양서적을 펴낸 무예전문기자이다.
( 조민욱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 mwcho@chosun.com )
(2002.02.14)
특전사에 표창술 전수한 철학도
서울대 관악 캠퍼스에는 도깨비가 살고 있다. 온몸이 파랗다 하여 ‘파란 도깨비’ 혹은 ‘파깨비’라 불린다. 바로 이창후(李昌厚ㆍ33)씨다.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1988년 입학 후 지금까지 일년 내내 파란색 옷만 고집하기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그는 늘 파란색이다. 파란색 바지에 파란색 티셔츠 파란색 외투. 심지어 양말과 운동화 목도리도 파랗다. 초상집에 문상 갈 때에도 파란색 옷을 입고 간다. “청학동에서 왔다”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물의 색깔인 파란 옷을 입는다” 등 억측도 많지만 그가 파란옷을 입는 이유는 단지 때가 타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는 대구에서 올라온 자취생이다. 단지 괴짜로만 여겨 ‘파깨비’를 얕보다간 큰 코 다친다. 태권도 공인 4단에 학사장교로 공수특전사에서 복무했으며, 부대에서는 태권도 교관을 지냈다. 태권도 하는 도깨비. 그것도 보통 태권도가 아니라 ‘무술 태권도’로 정평이 난 ‘연무재(硏武齋)’ 수석 사범이다. 연무재는 그의 서울대 태권도부 동문 선배이자 현재 연무재 부원장인 서재영(徐在永ㆍ48)씨가 전통 태권도를 연구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 자리잡고 있는 연무재를 찾았다.
도장 문을 연 순간 잠시 어리둥절했다. 태권도를 하는 곳이면 으레 “태권” “얍!” 이런 힘찬 기합과 함께 멋진 발차기가 붕붕 공중을 어지럽게 수놓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10여명 남짓한 회원들이 모두 바닥에 누워 몸을 활처럼 굽히고 있었다. 요가 수련장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호흡을 가미한 이런 동작을 하는 이유는 격한 수련으로 들어가기 전에 온몸의 관절과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다. 물론 일반 태권도 도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잠시 후 이창후씨가 나타났다. 역시 파란색이었다. 서둘러 도복으로 갈아입고 그도 수련에 참가했다. 하얀 도복에 검은 띠였다.
몸풀기가 끝난 후 본 수련으로 들어갔다. 먼저 ‘주춤 서 몸통 지르기’. 양 다리를 어깨 넓이 이상으로 벌리고 말 타는 자세로 걸터앉아 주먹으로 정면을 지르는 동작이다. 흔히 말하는 기마식에서 정권지르기. 그런데 이게 그냥 보통 정권지르기가 아니었다. 허리에 위치한 주먹이 곧장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틀어 어깨와 주먹이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주먹이 나가는데 마치 회초리를 휘두르듯이 온몸을 격렬하게 비트는 것이었다.
“뻣뻣하게 주먹만 지르는 것은 위력이 없습니다. 팔뚝의 힘만 전달될 뿐이죠. 하체를 낮추고 굳건히 안정되게 한 후 어깨의 힘을 빼고 허리를 쥐어짜듯이 비틀면서 주먹을 뿌려야 온몸의 파워가 실리게 됩니다. 끝에 추가 달린 채찍처럼 말입니다. 이는 호흡이 가미되어야 제대로 된 촌경이 가능하게 됩니다.”
촌경(寸勁)이란 극히 짧은 순간에 온몸의 힘이 마치 폭발하듯이 발산되는 것을 말한다. 태권도의 몸짓은 일반적으로 직선이다. 주먹도 발도 직선의 궤적을 그리며 힘을 외부로 표출시킨다. 그런데 연무재의 그것은 곡선이었다. 몸통과 팔다리를 쥐어 짜는 이런 동작들은 품새(몇 가지 공격과 방어의 동작들을 연결시킨 것)에 들어가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기존의 태권도 품새를 낱낱이 연구 분석하여 무술적 의미를 되살려 새로이 만들었다는 연법1식에서 7식까지의 연속동작들. 만련(慢鍊)이라 하여 느리게 움직일 때는 하나의 품새(연법)를 1분 정도에 마치다가 쾌련(快鍊)으로 들어가면 불과 10초만에 품새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몸통과 팔다리를 격렬하게 비틀고 짜면서 말이다. 순간순간 격렬하게 바닥을 구르는 동작들이 많은데 흔히 말하는 진각(震脚)이다. 이는 발을 세게 구르면서 온몸을 진동시켜 파워를 배가시키는 것이다. 이 또한 기존의 태권도에서는 볼 수 없는 동작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팔다리를 절대로 쭉쭉 펴거나 높이 차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권도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단옆차기도 없었다.
“발차기를 높이 하면 뭐합니까. 위력도 없고 상대방에게 잡히기 쉬울 뿐인데요. 한번 잡혀 넘어지면 끝이죠. 무술에서는 금기입니다.”
연무재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동작이 무술의 살인기술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보이기 위한 수련이나 겉만 화려한 발차기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이동동작에서도 그냥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낮게 차면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태권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순간 기자의 눈에 들어온 벽에 걸린 액자의 글귀. ‘極柔軟後極强’(극유연후극강). 지극히 유연해진 후에 지극히 강해진다. 그제야 연무재가 추구하는 ‘무술 태권도’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딱딱한 태권도, 발차기만 하는 태권도가 아니라 온몸을 부드럽게 하고 손동작 발동작 하나하나에 온몸의 체중을 실어 가격하는 무술의 공방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태권도 시합이요? 발차기로 포인트 따는 경기방식에 연무재는 맞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스포츠가 아니라 무술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시합은 하지 않습니다. 격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만 상하게 하는 격파는 사절입니다.” 격렬한 품새 수련이 끝난 후 그가 이번에는 기다란 곤봉을 들고 나왔다. 방금 끝낸 연법1식을 봉을 들고 똑같이 움직인다. 태권도에 봉이라니. 쿵푸 도장도 아니고 말이다. 대답이 걸작이다. “우리 민족은 기마민족이다. 모든 무예의 기원은 마상(馬上)무예다. 즉 말 타고 창이나 칼 등 병장기를 휘두르는 것이 무예의 시초다. 그것을 땅에서 병장기를 빼고 하면 태권도 품새가 되고, 무기를 들면 그대로 무기술이 된다.”
무예의 근원이 마상무예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품새 즉 맨손 무예인 권법(拳法)과 병장기 무술이 서로 호환될 수 있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병장기를 손이 조금 더 늘어난 몸의 일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바탕 봉을 휘두른 그는 느닷없이 표창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한쪽 벽에 마련된 스티로폼을 향해 던지는 것이었다. 표창의 굵기는 사람 엄지손가락 굵기의 것에서부터 머리핀 굵기의 가느다란 것도 있었다. 그의 손을 떠난 머리핀 굵기의 표창은 ‘팽’하는 소리를 내며 벽과 90도 직각으로 빨려 들어가듯 꽂혔다.
“이러한 표창도 일종의 수련입니다. 하체를 고정시키고 어깨 힘을 뺀 채 허리를 틀어 던지면 정확하게 표적물에 꽂히죠. 무술 기본동작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무거운 것보단 가벼운 것이 던지기가 어렵고 수련의 효과도 큽니다.”
한창 표창술에 심취했을 때에는 가방 안에 늘 이십여 자루의 표창을 들고 다녔다는 그가 구사하는 표창술은 조금 특이하다. 보통 표창을 던지면 회전을 하면서 날아가게 마련인데 전혀 회전이 없이 일자로 날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던져야 정확하게 꽂힌단다. 자신이 복무했던 공수특전사에도 이처럼 ‘회전 없는 표창술’을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기존의 전형화된 틀을 벗어난 품새에 봉술 표창술. 많은 이들이 소문을 듣고 연무재를 찾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에 대부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고 한다. 이처럼 연무재는 강한 태권도, 강한 무술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연무재 원장인 이광희(李光熙ㆍ55)씨의 공로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64학번인 이광희씨는 초기 태권도 5대 도장의 하나였던 창무관에서 8단을 땄으며, 30년 이상 세계 각국의 무술을 비교 연구하여 오늘날 연무재류(流)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독특한 태권도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창후씨는 그를 서울대 태권도 동아리 선후배로 만나 사제(師弟)의 연을 맺게 되었다.
■ 5개 국어로 태권도 사이트 운영
이창후씨는 현재 태권도 철학의 이론화 작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원래 그의 전공이 철학이다. 작년에는 ‘태권도의 철학적 원리’라는 책을 냈으며, 인터넷 상에서는 태권도 전문사이트(www.taekwondobible.com)를 운영하고 있다. 한글,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 프랑스어, 말레이어로도 제작되어 있다. 그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어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재주많은 ‘도깨비’였다. 새해 초에는 루마니아에 다녀왔다. 그곳 현지인 태권도 사범의 초청으로 루마니아어로 된 태권도 교본을 만드는 작업을 도와주었단다. 작년 여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태권도를 전수해주고 왔다. 올해는 미국과 캐나다에 갈 예정이다. “태권도는 세계 공용어입니다. 그리고 경기 태권도와 무술 태권도는 저마다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서로의 장점을 살려 나가면 더욱 강하고 아름다운 태권도가 나올 것입니다.”
책을 내고 5개 국어로 된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표창을 던지는 ‘파란 도깨비’에게 태권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의 자작시를 감상해보자.
‘내가 주먹을 쥐는 것은/ 하나의 단단한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니요/ 부풀어 오르는 가슴/ 그 속의 불길을 내뿜기 위함이 아니요/ 조용한 물가에 거품을 일으키는/ 한마리의 고기를 잡기 위함이 아니요/ 저 높은 곳을 향해/ 날개를 달기 위함이 아니다/ 다섯 손가락이 조용히 긴장하는/ 손 안의 작은 공간에서/ 무한히 열리는 삶을 위한 길로 들어서고자 함이니/ …’
◆조민욱
‘무림 고수 열전’ 필자인 조민욱(32) 기자는 서울대 정치학과 88학번이다. 대한십팔기협회 공인 십팔기 5단, 동양무예연구소 전문위원이며 조선일보 인터넷 기자클럽(http://club.chosun.com/refo14)에서 ‘무예 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달마야 장풍 받아라’(조선일보사 간)라는 무예 교양서적을 펴낸 무예전문기자이다.
( 조민욱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 mwcho@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