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25
2001.12.28 09:31:51 (*.168.82.2)
1380
단결!
운영진 최경수 입니다
전우들의 살아가는 소박한 이야기 입니다.
[젊음이 세상을 바꾼다 ⑶] 조리사 이동진씨 “학교선 꼴찌…요리는 일류돼야죠”

서울시내 인문계고교 입학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104점일 때 103점 맞아 결원이 있는 신설고교에 턱걸이 입학.고교 진학후에도 반에서 꼴찌를 도맡았고 동네 형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질을 일삼고 사고치기 일쑤….
수원 아주의대병원 옆에 이달초 문을 연 레스토랑 ‘오페라’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이동진씨(25)가 돌아본 중고교 시절이다.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이씨는 “전교 1등만큼 하기 어렵다는 전교 꼴찌도 몇번 해봤다”고 스스럼 없이 털어놓는다.
“초등학교 때 수영을 하다 그만두고 중학교 가면서 만화에 끌렸어요.어머니의 반대로 그만두면서 공부와는 담을 쌓았지요”
중학교 3년 동안 공부를 해본 기억이 없다. 중3 때 담임선생님은 집안도 넉넉하고 성격도 좋은데 성적이 엉망인 그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놀려면 확실하게 놀아라.나중에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성공하는 거다”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놀고나서도 후회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지만 빗나가기 시작한 마음이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다.고등학교 가서는 싸움을 잘 하지 못해 맞으면서도 싸움패에 끼여 다녔다.팔도 뿌러지고 갈비뼈에 금이 가기도 했지만 한번 싸움판을 벌이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고2말 때 싸움패에서 만난 선배가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이씨를 끌었다.아줌마들 틈에 끼여 요리를 하고 나서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았지만 한달쯤 다니다 그만두었다.뭐든 열심히 하고 싶은 게 없을 때였다.
“고3 올라갈 때 선생님들이 직업반을 권했지만 부모님들께 고등학교만은 정상적으로 졸업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싫다고 했지요”
선생님들이 대학 진학이 어려우니 기술이라도 익혀야 한다며 직업반을 여러번 권했고,그는 한번 해봤던 요리를 선택했다.직업반에 들어가면 1년동안 학교는 일주일에 한번 나오고 학교에서 지정한 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그곳에서 아버지 어머니 다음으로 존경하는 김지연 원장을 만나게 된 것을 이씨는 지금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위탁생들에게 김원장은 “하면 된다”며 다그쳤다.그동안 이들이 수없이 들었던 말이 ‘그저 말썽만 부리지 말고 조용히 하라’였지만 김원장은 할 때까지 야단치고 어쩔 수없이 따라하면 칭찬이 한보따리였다.
“조리사 필기 시험보기 위해 정말 몇년만에 공부라는 걸 해봤어요”3학년 1학기 때 양식분야 필기시험에 합격한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그래 하면 된다.해보자”실기시험에 오믈렛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를 듣고는 계란을 1판씩 사들고 집에 갔다.몇개월동안 온집안 식구들이 신물나도록 달걀요리를 먹어야 했다.그해 10월 실기시험에도 합격해 양식조리사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도 땄고 할 일 다했다 싶었는데 어머니가 욕심을 내시더군요” 어렵사리 마음잡은 아들에게 대학진학을 권했다.수능시험을 안보겠다는 이씨에게 어머니는 “도시락 맛있게 샀으니 밥이나 먹고오라”며 등을 떠밀었다.대학 진학에 관심이 없었던 이씨는 대충 찍어놓고 자다 일어나곤 했으니 결과는 뻔한 것.
“희한한 점수가 나왔어요.46.8점이요.공부 잘하는 아이 언어영역 한과목 점수보다 못한 점수지요” 그런 점수를 보고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한살위인 형과 함께 원서를 한상자 사서 들고와 조리사 자격증을 인정해주는 특별전형을 찾았다.지금은 산업정보대로 이름을 바꾼 대구신일전문대 조리과에 원서를 내놓곤 “형과 여행삼아 다녀오라”고 다시 등을 떠밀었다.특별전형 수험생 중 당연히 꼴찌였다.가망이 없어 보였는데 추가합격이 됐다.대학가서도 욱하는 성격 때문에 싸움질을 했다.
“한학기만 다니면 졸업인데 사회에 나갈 생각을 하니 겁이 나더군요.그래서 군대로 도망갔어요” 취사병으로 지원했는데,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공수부대 특전사에 배속받았다.취사병도 예외없이 낙하산 타고 고된 훈련을 해야 했다.얻어맞고 기합받으면서 급한 성질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했고,‘내 앞가림은 내가 해야 된다’는 결심도 섰으니 군생활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제대후 바로 B고교 단체 급식 주방장으로 취직했다.급식이다보니 질보다는 양 위주였다.이게 아니다 싶어 요리학원의 김원장을 찾아 진로를 상담했다.김원장은 대학을 일단 마치고 이탈리아에 가서 정통 요리를 배워볼 것”을 권했다.학원에서 요리학원서 취업반 부담임을 맡아 지도하면서 남은 학기를 마친 뒤 바로 이탈리아로 떠났다.단기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지난 1일 부터 오페라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있다.퇴근해 집에 들어오면 자정이 지나있기 일쑤지만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요리책을 보면서 공부하다 잠자리에 든다.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한마디 한다.“학생 때 그렇게 공부했으면 일류대학 갔겠다”눈총받는 꼴찌에서 푸른 꿈을 품은 청년으로 변신하는 데는 부모님들의 사랑이 큰몫을 했다.
“엇나가기만 하는 아들이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계셨어요.신앙심이 깊은 어머니는 저를 위해 새벽기도를 빠트리지 않았고 금식기도도 여러번 하셨습니다”
약학박사로 전문경영인인 아버지는 요리를 공부하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네 인생은 네 것이다.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라”며 흔쾌히 승락해주셨다.어머니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지금은 제일 든든한 후원자다.이씨는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고,어머니와 같은 아내를 얻고 싶지만 나 같은 자식은 낳고 싶지 않다”며 웃는다.실력을 더 쌓은 뒤 부모님께 한상 근사하게 차려드리고 싶다는 그의 꿈은 작지만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전문식당을 차리는 거다. “공부만 강요하지 말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적성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고 봐주세요”
운영진 최경수 입니다
전우들의 살아가는 소박한 이야기 입니다.
[젊음이 세상을 바꾼다 ⑶] 조리사 이동진씨 “학교선 꼴찌…요리는 일류돼야죠”

서울시내 인문계고교 입학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104점일 때 103점 맞아 결원이 있는 신설고교에 턱걸이 입학.고교 진학후에도 반에서 꼴찌를 도맡았고 동네 형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질을 일삼고 사고치기 일쑤….
수원 아주의대병원 옆에 이달초 문을 연 레스토랑 ‘오페라’에서 조리사로 일하는 이동진씨(25)가 돌아본 중고교 시절이다.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이씨는 “전교 1등만큼 하기 어렵다는 전교 꼴찌도 몇번 해봤다”고 스스럼 없이 털어놓는다.
“초등학교 때 수영을 하다 그만두고 중학교 가면서 만화에 끌렸어요.어머니의 반대로 그만두면서 공부와는 담을 쌓았지요”
중학교 3년 동안 공부를 해본 기억이 없다. 중3 때 담임선생님은 집안도 넉넉하고 성격도 좋은데 성적이 엉망인 그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놀려면 확실하게 놀아라.나중에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성공하는 거다”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놀고나서도 후회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지만 빗나가기 시작한 마음이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다.고등학교 가서는 싸움을 잘 하지 못해 맞으면서도 싸움패에 끼여 다녔다.팔도 뿌러지고 갈비뼈에 금이 가기도 했지만 한번 싸움판을 벌이고 나면 속이 후련했다.고2말 때 싸움패에서 만난 선배가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이씨를 끌었다.아줌마들 틈에 끼여 요리를 하고 나서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았지만 한달쯤 다니다 그만두었다.뭐든 열심히 하고 싶은 게 없을 때였다.
“고3 올라갈 때 선생님들이 직업반을 권했지만 부모님들께 고등학교만은 정상적으로 졸업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싫다고 했지요”
선생님들이 대학 진학이 어려우니 기술이라도 익혀야 한다며 직업반을 여러번 권했고,그는 한번 해봤던 요리를 선택했다.직업반에 들어가면 1년동안 학교는 일주일에 한번 나오고 학교에서 지정한 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그곳에서 아버지 어머니 다음으로 존경하는 김지연 원장을 만나게 된 것을 이씨는 지금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위탁생들에게 김원장은 “하면 된다”며 다그쳤다.그동안 이들이 수없이 들었던 말이 ‘그저 말썽만 부리지 말고 조용히 하라’였지만 김원장은 할 때까지 야단치고 어쩔 수없이 따라하면 칭찬이 한보따리였다.
“조리사 필기 시험보기 위해 정말 몇년만에 공부라는 걸 해봤어요”3학년 1학기 때 양식분야 필기시험에 합격한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그래 하면 된다.해보자”실기시험에 오믈렛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를 듣고는 계란을 1판씩 사들고 집에 갔다.몇개월동안 온집안 식구들이 신물나도록 달걀요리를 먹어야 했다.그해 10월 실기시험에도 합격해 양식조리사 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도 땄고 할 일 다했다 싶었는데 어머니가 욕심을 내시더군요” 어렵사리 마음잡은 아들에게 대학진학을 권했다.수능시험을 안보겠다는 이씨에게 어머니는 “도시락 맛있게 샀으니 밥이나 먹고오라”며 등을 떠밀었다.대학 진학에 관심이 없었던 이씨는 대충 찍어놓고 자다 일어나곤 했으니 결과는 뻔한 것.
“희한한 점수가 나왔어요.46.8점이요.공부 잘하는 아이 언어영역 한과목 점수보다 못한 점수지요” 그런 점수를 보고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한살위인 형과 함께 원서를 한상자 사서 들고와 조리사 자격증을 인정해주는 특별전형을 찾았다.지금은 산업정보대로 이름을 바꾼 대구신일전문대 조리과에 원서를 내놓곤 “형과 여행삼아 다녀오라”고 다시 등을 떠밀었다.특별전형 수험생 중 당연히 꼴찌였다.가망이 없어 보였는데 추가합격이 됐다.대학가서도 욱하는 성격 때문에 싸움질을 했다.
“한학기만 다니면 졸업인데 사회에 나갈 생각을 하니 겁이 나더군요.그래서 군대로 도망갔어요” 취사병으로 지원했는데,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공수부대 특전사에 배속받았다.취사병도 예외없이 낙하산 타고 고된 훈련을 해야 했다.얻어맞고 기합받으면서 급한 성질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했고,‘내 앞가림은 내가 해야 된다’는 결심도 섰으니 군생활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제대후 바로 B고교 단체 급식 주방장으로 취직했다.급식이다보니 질보다는 양 위주였다.이게 아니다 싶어 요리학원의 김원장을 찾아 진로를 상담했다.김원장은 대학을 일단 마치고 이탈리아에 가서 정통 요리를 배워볼 것”을 권했다.학원에서 요리학원서 취업반 부담임을 맡아 지도하면서 남은 학기를 마친 뒤 바로 이탈리아로 떠났다.단기과정을 마치고 귀국해 지난 1일 부터 오페라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있다.퇴근해 집에 들어오면 자정이 지나있기 일쑤지만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요리책을 보면서 공부하다 잠자리에 든다.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한마디 한다.“학생 때 그렇게 공부했으면 일류대학 갔겠다”눈총받는 꼴찌에서 푸른 꿈을 품은 청년으로 변신하는 데는 부모님들의 사랑이 큰몫을 했다.
“엇나가기만 하는 아들이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계셨어요.신앙심이 깊은 어머니는 저를 위해 새벽기도를 빠트리지 않았고 금식기도도 여러번 하셨습니다”
약학박사로 전문경영인인 아버지는 요리를 공부하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네 인생은 네 것이다.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라”며 흔쾌히 승락해주셨다.어머니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지금은 제일 든든한 후원자다.이씨는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고,어머니와 같은 아내를 얻고 싶지만 나 같은 자식은 낳고 싶지 않다”며 웃는다.실력을 더 쌓은 뒤 부모님께 한상 근사하게 차려드리고 싶다는 그의 꿈은 작지만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전문식당을 차리는 거다. “공부만 강요하지 말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적성에 맞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고 봐주세요”